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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세계/좋은 책과 리뷰

한글의 탄생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 김기연, 박수진 옮김




한글의 탄생.

처음엔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후광에 기대어 낸 책이 아닐까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또한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데에 반감이 들기도 했다.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과연 한글이라는 문자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했을까? 그 과정에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스며들진 않았을까? 하지만 내 이런 의심들은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저자는 내내 지구상에 존재하는 타 문자들보다 한글이 우수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논지를 펼쳐가며,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과학적인 한글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언어학, 더 나아가 음성학, 음운론의 측면에서 분석해나간다. 


첫 시작부터 저자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한글은 언어체계의 명칭이 아니라 문자체계의 명칭이라는 것! 즉, 한국의 언어라면 한국어인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인식을 못한채 살아온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한글이 우수하다, 과학적이다라고 주장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 내심 부끄러웠다. 


저자는 말과 문자, 더 나아가 민족, 이 세 요소의 관계를 언어학적 측면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형음의'라는 트라이앵글 시스템 상에서 문자가 '게슈탈트(형태)'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한자, 일본어의 예를 들며 설명해나간다. 이후 한글의 생성과정, '정음'이라는 문자가 어떻게 창제되었고, 그 바탕에 어떤 이론적 배경에 녹아 있는지, 자음과 모음의 구성은 어떠한지 등, 선입관이지만 일본인 학자가 분석했다고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한글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해놓았다. 


사실, 이 책은 언어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쉬운 책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한글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면서도 왜 그런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나 공부를 게을리 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번역가로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번역 또한 언어학적 측면에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기호나 문자가 우리가 내는 목소리의 음과 그 음에 담긴 의를 옮기는 도구라면, 번역은 타 문자의 음과 의를 또 다른 언어의 음과 의로 옮기는 작업이기 떄문이다. 완전한 변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런 번역이라는 작업은 더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고, 더 나아가 역사적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 번역문화가 풍성했던 일본 메이지 시대, 일본은 외래어를 자국의 언어로 바꾸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큼 빨리 근대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사실, 쉽지 않은 이 책은 한 번 정독한다고 해서 이해가 될 만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번의 정독으로 문자와 언어의 탄생, 한글의 과학적 구조 등을 느끼고 체득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으로 보이며, 수 차례 스터디를 하며 언어학의 측면에서 한글을 분석해보고 더 나아가 번역의 영역에서 그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삼아야 할 것 같다. 


좋은 책을 만나서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