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번역의 세계/번역가의 삶

로마인 이야기 -번역가 김석희 선생님 인터뷰


▲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5권 전체를 번역한 번역가 김석희씨.
ⓒ 오마이뉴스 조경국

 

공전의 히트작 <로마인 이야기>가 드디어 15권 완간되었다. 지난 13일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북하우스에서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저자와 출판사와 독자를 위한 밤" 행사가 한길사 주최로 열렸다.

많은 참석자들의 축하의 말 중에서, 출간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독후감 대회에 당선돼 로마기행까지 했던, 이제는 대학생이 된 독자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때 독서토론 써클에 푹 빠졌던 내 경험 탓일까. 그런데 이후로 책과는 담을 쌓았던 나를 다시 독서의 바다로 이끈 주범이 바로 <로마인 이야기>였다. 귀신같은 번역으로 <로마인 이야기>를 재창조한 번역가 김석희씨를 형식적으로 인터뷰하는 것보다 그와 간단하게나마 독서토론을 하고 싶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침 교양과학서적 하나를 초짜로 번역하고 있는 나로서는 200권이 넘는 번역서를 낸 베테랑을 마주한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의 소탈한 미소는 나의 두려움도, 원작자의 부재가 가져다 줄 법한 공허함도 넉넉하게 감싸주었다.

김석희씨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으로 데뷔한 후 영어·불어·일어를 넘나들며 번역하고 있다. <로마인 이야기> 외에 <르네상스의 여인들>, <해저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등 20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1997년 한국번역대상을 수상하였다.

"어느 로마 병사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를 따라 갈리아 전선을 누비다가 전쟁이 끝나서는 시골에 정착한 심정"이라는 그의 소회에 "퇴직금은 두둑하게 받으셨나요?"라는 질문으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뭐, 섭섭지 않게 줬으니까…"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래는 김석희씨와의 일문일답.

"저자가 아마추어였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

 


▲ 북하우스에서 열린 '<로마인 이야기>, 저자와 출판사와 독자를 위한 밤' 행사에서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김석희씨.
ⓒ 오마이뉴스 조경국

 

- 열다섯 권 모두 자식 같은 심정일 텐데.
"저자가 됐건 역자가 됐건 책을 낸다는 건 일정부분 자기의 혼을 쏟은 거니까 당연하다."

- 그 중 제일 인상적인 것 하나만 꼽으라면?
"1권이 제일 좋았다. 번역에서도 1권은 시작을 의미한다. 또한 그 책에 대한 의미부여까지도 해야 되니까. 사실 그 때 정말 잘 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많았다. 작가가 일본, 여류, 아마추어라는 세 가지 약점이 있었다. 한길사 김언호 사장 뚝심이 큰 힘이 됐다.

이 책에 대한 역자후기로 쓴 게 제1권이었는데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썼고, 그리고 일부러 그때부터 염두에 뒀다. 그 다음에는 중간중간에 쓸 필요는 없고, 마지막 끝냈을 때 감상적으로 쓰자. 그래서 제15권 역자 후기에는 역자로서의 소회를 밝히는 식으로, 어느 로마 병사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를 따라 갈리아 전선을 누비다가 전쟁이 끝나서는 시골에 정착한 그 병사 같은 소감으로 썼다."

- 내 생각엔 <로마인 이야기> 문체의 핵심은 '적나라함',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
"그게 중요하다. 상아탑에 갇혀 있으면 오히려 쓰기 힘들다. 시오노는 일류작가 같은 다듬어진 고운 문장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로마인 이야기>를 살아있게 하는, 힘 있는 문장이다. 일본에서는 작가들의 문장에 출렁임이 없다. 곱긴 한데 읽는 재미는 덜하다."

- 그리고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의문을 잘 충족시켜 준 것 같다. 전투장면의 세세한 묘사도 그렇고.
"오히려 아마추어였다는 것이 장점이다. 작가의 문체가 하드웨어라면 소프트웨어는 로마 천년제국의 지혜, 관용, 현실주의, 로마법, 시스템, 인프라 등등이다. 지금 다시 로마를 읽게 한 것은 단순히 역사만으로 쓴 게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리더십의 문제였다. 다나카 수상의 금권정치 몰락, 경제거품, 그로 인한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갈구, 이런 게 일본사람들한테 있었다. 사실 이 책은 <로마 제왕사>다. 기본적으로는 리더십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나라에도 먹혔다. 전두환 노태우, 그 이후 3김 시대는 진정한 지도자는 아니다. 정치배들일 뿐이다. 정말 지도자는 어떤 것인가. 시오노 선생이 말하는 지도자는 백성 편하게 하는 지도자다. 백성 편하게만 한다면 제국주의라도 좋다. 그게 오히려 제국주의 찬미한 거라고 하는데 문맥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앞뒤를 잘라서 쓰면 기사쓰기는 좋다."

시오노 나나미가 던진 인간에 대한 통찰


ⓒ 오마이뉴스 조경국
- 특히 공공성을 강조하는 것이, 최근 일본에서 애국심 교육을 강조하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건 기본적으로 번역서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일본사람이며, 일본 독자를 1차 독자로 상정해서 쓴 것이다. 번역서를 읽을 때는 이런 점들을 감안해야 한다."

- 그런데 그게 오히려 공공성의 문제, 시스템의 부재로 고통 받는 면이 많은 한국에서 대히트를 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특히 외국 나들이 많이 하는 기업가들이 그런 문제들을 많이 인식했다. 처음 출판했을 때 모 은행에서는 <로마인 이야기> 관련해서 무슨 사내 프로그램으로 만들기도 했다. 어느 회사 사장이 너무 좋은 책 번역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 로마의 시스템에 감명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교훈을 돌아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제도화될 수 없는 사람의 자율성까지 계산에 둔, 인간에 대한 고려가 아닐까 한다. 결국은 시오노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아닐까.
"그런 면이 있다. 역사에 대한 평가라고 하는 것이, 서양적 사고방식으로 오현제처럼 어떤 물리적 전성기만 따지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엔 카이사르가 로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때가 절정이었다고 본다. 제정 때는 틀이 너무 잡혀 있어서 다이내믹한 게 없어지고, 시스템에 너무 의존한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 시오노 선생은 어떤 사태를 설명할 때 항상 인간의 보편적인 습성을 끌어 온다.
"그것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게 만든 독특한 매력이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하는데, 카이사르 같은 창조적 천재들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당시만의 독특한,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문제들도 있었을텐데.
"시오노는 자기가 자료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다. 이건 소설이 아닌 '역사평설'이다."

- 카이사르가 베르긴게토릭스와 벌인 알레시아 공방전의 예를 들면서 군사적 천재라고 하는데….
"갈리아나 게르만이나 그 사람들에게는 전술전략이 거의 없었던 사람들이다. 갑옷이나 그런 것도 없고. 단순한 병력만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 한니발이나 스키피오가 명장으로 주목받지만, 삼국지나 초한지와 비교해 보면 별거 없다는 얘기도 있다.
"중국은 전국시대라는 말이 있을 만큼 싸우는 기술이 발달했다. 로마시절에서는 한번 대승으로 수십 년을 지배했다. 개인적으로는 대등한 세력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삼국지 등에는 소설적 과장이 많다."

- 제국을 논하는 저자에게 일본제국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주 당연할 것 같다.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제1독자는 일본 독자다. 내가 직접 물어본 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어느 인터뷰에서 시오노는 팍스 아메리카나 이거는 평화도 아니다 라며 굉장히 반대한 적이 있다. 팍스라고 하는 건 평화고 평온인데, 지금 팍스 아메리카나는 이건 전쟁 일으켜서 스스로 적을 만들고 적이 되고 그런 건데, 로마는 안 그랬다.

게르만 민족 이동 이전에 속국들이 반란 일으킨 예가 거의 없다. 팍스 로마나가 기능했다는 것은 현지인등용하는 등 아주 철저하게 현지인을 위한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거기서 똑똑한 사람은 원로원도 되고 나중에 황제까지 된다."

"팍스 로마나가 가능했던 것은 철저한 현지화 정책 때문"

ⓒ 오마이뉴스 조경국
- 일본에서의 인터뷰에서 "한일이 다투면 중국 좋은 일만 한다"는 취지의 얘기가 있었다. 이런 발언은 진정한 코스모폴리타니즘적 입장에서 좀 이상하지 않나.
"지역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과도한 관심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시오노가 지엽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 우리나라 번역 풍토가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하나로 10여 년간 번역한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고 앞으로 좋은 본보기가 될 터인데, 전문번역가로서 우리 번역문화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한심할 정도다. 짜깁기하고 표절하고 해도 논문이라면 학술 업적으로 인정하면서 전공 관련 번역서는 인정 안 한다. 또, 노벨문학상 받겠다면서 우리나라 작품 외국어 번역을 졸속으로 해서 문제가 아주 많다. 가령 <로마인 이야기>를 중학생 수준으로 해 버리면 그 수준이 그냥 보일 거 아닌가.

지금 우리나라 문학들 불어로 영어로 번역되는 게 거의 그런 수준이다. 나는 초기에 번역도 하고 창작도 했었다. 그러다가 <로마인 이야기> 번역하면서, 끙끙거려봐야 되지도 않는 소설 쓴다고 폼 잡느니 제대로 된 좋은 책 번역하는 게 사회적으로 이바지하는 바가 더 클 것이다, 그런 깨달음으로 번역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나는 스스로를 전문 번역가이고 프로라고 얘기한다. 이렇게만 해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제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게 고무적인 일이다."

- 외국에서는 번역본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사회의 어떤 성숙도와도 연결된다. 우리도 옛날엔 다 해적판 아니었나? 이제는 로얄티 줘야 하기 때문에 좋은 번역을 해야 제대로 팔 수 있다는, 이런 인식의 전환이 출판계 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 그래서 조금씩 번역에 대한 태도들이 바뀌고 있는 게 좋은 거다. 번역이란 기본적으로 또 다른 세계를 받아들여 이해하려는 건데, 우리는 그런 훈련이 안 돼 있다. 세계화된다고 하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우리가 조금씩 맞춰서 사회적 수준, 국가의 격을 높이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15권을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 역자로서 한마디 한다면.
"'고맙다.' 번역하는 입장에서는 나 같은 행운아는 없을 거다. 그런 행운이 일회성으로 끝난 것도 아니고, 좋은 저자, 좋은 출판사, 좋은 독자를 만나서 인연을 만드는 고리들 몇 개가 중첩되고 맞물려 10년 넘게 올 수 있다는 것은 너무 고맙고 복이다."

인터뷰 내내 김석희씨는 자신이 행운아임을 누차 언급했다. 그러나 그 많은 '좋은 독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좋은 역자' 한 명을 가졌다는 그 수많은 행운을 그는 아직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마치 우리가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의 존재를 짐작조차 못한 것처럼. 

'번역의 세계 > 번역가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사항  (0) 2009.04.08
마시멜로 이야기  (0) 2009.04.08
외화번역가의 삶  (0) 2009.04.08
소설가들이 번역까지  (0) 2009.04.08
번역이 살아야 학문도 출판도 살지요  (0) 2009.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