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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세계/좋은 책과 리뷰

운명



운명 / 임레 케르테즈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이 책을 보게 된 처음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책장을 넘기며 마치 소년의 삶이 나의 삶이 된 듯, 한 소년의 ‘운명’의 결말이 어떠할지 의구심을 가지며 또다시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작가는 유대인 학살 및 나치 수용소 생활을 직접 체험하였고, 평생의 집필활동의 화두를 ‘유년시절의 수용소 생활’로 삼았다. ‘운명’은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와 작가의 수용소 생활을 그린 삼부작의 작품으로 분류된다. ‘운명’이 집필되고 완성된 것이 1975년이지만 30년 이상이 지난 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 헝가리의 시대적 상황이 공산주의 이론에 벗어나는 서적의 발간을 금지한 탓이다. 헝가리가 자유화되기 시작하고 2002년에 저자가 노벨문학상을 타기까지 저자는 끊임없이 집필 활동을 한다. 몇 평 남짓 되지 않는 아파트에서 아내와 평생을 함께 하며,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았으며 현재도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작가와 같은 운명을 아이에게 되 물리기 싫어서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는데, 유년시절의 참혹한 경험이 항상 악몽으로 따라 다녔을 것이고,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에 아이가 살기를 원하지 않은 탓일까? 내가 굳이 이런 추측을 한다면 ‘운명’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와 틀린 듯하다. 인간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운명이 무엇인지, 운명이 있는 것인지............................

‘아우슈비츠’, ‘나치’, ‘홀로코스트’ 등의 악몽을 되살리기 보다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일까?

소년 ‘죄르지’는 ‘아우슈비츠’, ‘부헨발쯔’, ‘짜이츠’ 수용소로 옮겨 다니며, 수용소의 참상을 경험한다. ‘유대인 학살’ 및 ‘수용소 생활’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죄르지’의 눈을 통해 다가오는 하나하나의 삶의 동작들을 표현한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며, 마치 꿈이 있는 도시에 희망을 품고 가듯 ‘순수함’까지 보여준다. 자신이 간 곳이 수용소임을 차츰 차츰 알게 되고, 연기가 계속 뿜어져 나오며 가죽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굴뚝들이 가죽공장의 굴뚝이 아니라 ‘사람 가죽 공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종을 구분한 알파벳, 수감번호, 배식, 배급 등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들을 삶 자체로 받아들인다.

이런 작가의 문체가 나치 수용소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소년의 생각, 느낌을 통하여 독자들이 더 실감나게 당시의 악몽을 느끼게끔 해주는 것 같다.

책을 읽고 있는 나조차 초반에는 유대인 학살을 경험한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덤덤하게 글을 이어가는지 의아해 했다.

다른 수용소로 끌려 다니며 별반 차이 없는 환경에서 소년은 ‘자유’를 찾는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뒷사람에 기대어 웅크리고 잘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픈 탓에 의무실에서 냄새나는 메트리스에서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운명 안에서 자유를 찾아다닌 듯 하다. 소년에게는 그런 것들이 자유였다.

 

만일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이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란 것이다.

 

삶의 일부분, 생활의 일부분으로 소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들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여러 작가들이 당시의 참상을 글로 표현하려 했고 상세하게 묘사하며 고발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삶을 자살로 마감했다고 한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한 것이다. ‘운명’을 쓴 작가와는 다소 대조적인 부분이라 생각한다.

소년 ‘죄지르’는 집에 돌아오게 되었고, 많은 것들이 변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계모는 아버지가 수용소에 가기 전 일을 위임했던, 남자와 결혼을 하였고, 자신의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예전 이웃들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몸부림 쳤다고 얘기한다. 그들 또한 그들에게 다가온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살 수 있는 방법을 수없이 모색 했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답게 심오한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 같다. 책의 줄거리와 내용보다는 소년 ‘죄지르’가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을 간접 체험하며 ‘운명’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운명을 바꾸려하기보다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부딪히며 살아가고 자유를 느끼라는 의미일까.

마지막 장을 넘긴 후 적극적으로 알아보지 않았었던 유대인, 유대교,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히틀러 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책을 덮은 후 너무 자연스럽게 한 행동이라 내가 생각해도 의아했다. 새벽 세시가 넘었고, 바로 잠들었어도 되었을 텐데 말이다. 유대인 학살 사진에 경악하고,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이유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찾아보며,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하이드리히’가 ‘홀로코스트’를 실제적으로 지휘했고, 테러의 의해 죽는 과정까지(하이드리히가 죽은 후 히틀러는 보복으로 체코의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주민들을 대량학살 하였다고 한다.) 여러 이야기들을 찾아 다녔다.

참 씁쓸하면서도 아이러니 한 것은 비극이 비극을 부르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많은 독일인들이 보복과 테러로 죽어갔다고 한다. 유대인 학살과 같은 또 다른 대량 학살이 자행 된 것이다. 독일인들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던 것이다.

지금도 이념과 종교로 인한 갈등으로 전쟁이 계속 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의 공포는 우리 옆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사고를 전환할 수 있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조금 느낀 듯 하다. 현재 나에게 닥쳐온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기존에 생각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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