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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세계/Useful Expression

안정효 선생님의 Q-English-굶주린 배는 악마의 놀이터

이 연재물을 위해 필자는 1971~1978년에 걸쳐 제작된 콜롬보 영화 총 65편 가운데 40편에서 참고가 될 만한 대화를 솎아냈는데, 사실 <형사 콜롬보> 시리즈만으로도 영어 공부를 위한 종합적인 교과서 기능을 충분히 하는 자료가 되리라는 생각이다. 콜롬보 대사는 다양한 기법을 스스로 구사할 뿐 아니라 멋진 문학적 표현과 인용문을 차용하는 allusion과 quotation의 사례도 적지 않다.

‘기다리는 여인(Lady in Waiting)’ 편에서 콜롬보는 수잔 클라크에게 레슬리 닐슨의 증언을 상기시키며 범죄 사실을 시인하도록 압박한다. “He heard the shots first, then the alarm. That’s the cart before the horse.”(그분은 총성을 먼저, 그런 다음에 경보기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렇다면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얘기죠.)

put (get, set, have) the cart before the horse(마차를 말보다 앞에 세우다)는 “말이 마차를 끌지 마차가 말을 끄느냐”는 의미로서, 앞뒤(本末)가 뒤바뀐 상황을 꼬집는 속담에서 유래하는 표현이다.

‘온실의 비밀(The Greenhouse Jungle)’ 편에서는 레이 밀랜드가 조카 브래드포드 딜먼의 아내를 찾아가서 납치범한테 돈을 줘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Blood is thicker than martinis.”(피는 술보다 진하니까.) 이것은 물론 Blood is thicker than water(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속담의 변형이다. “이웃 사촌이 가족보다 낫다”는 우리 속담과 상반되는 주장이겠다.

‘뒤집힌 사진(Negative Reaction)’ 편에서는 살인사건 현장에서 총성을 들었다는 주정뱅이 증인을 만나러 무료급식소로 찾아간 콜롬보를 걸인으로 오해한 수녀가 갖가지 격언을 인용해가면서 힘겨운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위로의 말을 늘어놓는다. “A man’s worth is not judged by the size of his purse.”(인간의 가치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지갑의 크기로 결정되는 게 아니랍니다.) “An empty stomach is the devil’s playground.”(굶주린 배는 악마의 놀이터이고요.) 나중 속담은 “먹고 살기가 워낙 힘들면 어쩔 도리가 없이 온갖 나쁜 짓을 하게 마련이다”라는 뜻이다.

‘포도주 살인사건(Murder Under Glass)’ 편에는 프란스 뉴옌이 fortune cookie를 콜롬보에게 주는 장면이 나온다. 번역 영상물을 보면 흔히 fortune cookie를 ‘행운의 과자’라고 옮기고는 하는데, 여기에서의 fortune은 ‘행운’이 아니라 ‘점괘(占卦)’나 ‘운세(運勢)’를 뜻한다. 신문에 실리는 ‘오늘의 운세’처럼 재미로 점을 보는 과자가 fortune cookie다. 작은 만두처럼 생긴 점치는 과자의 딱딱한 껍질을 깨트리면 오늘의 운세를 적은 종이가 나온다. 콜롬보의 운세는 내용이 이러하다.

“Cheer up. There’s more than one fish in the sea.”(힘내세요. 바다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뿐은 아니니까요.) many fish in the sea는, 속된 우리말로 하자면, ‘많고 많은 게 여자’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콜롬보의 점괘는 “오늘 혹시 여자한테 차였더라도, 길거리에 나가면 다른 여자가 얼마든지 많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격려의 말이다.

그날 저녁에 콜롬보는 프랑스인 요리비평가 루이 주르당이 복어의 독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밝혀내려고 일식집으로 그를 찾아간다. 같이 식사를 하던 여비서가 눈치도 없이 콜롬보에게 복어 독에 관한 설명을 자꾸 털어놓자 불안해진 주르당이 말을 가로막는다.

“I don‘t think our guest is interested in fish stories.”(우리 손님께서는 생선 얘기엔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fish는 단수형과 복수형이 같을 뿐 아니라, 형용사 fishy(수상한, 의심스러운)와 동음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르당의 ‘생선 얘기’는 ‘수상한 얘기’처럼 들린다.

어쨌든 수상한 정보를 확보한 콜롬보는 물러가면서 주르당에게 상기시킨다. “As the Chinese say, there’s more than one fish in the sea.”(바다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뿐은 아니라고 중국인들이 그러죠.)

여기에서도 그렇지만, as the Chinese say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there’s more than one fish in the sea가 과연 정말로 중국에서 유래하는 표현일까?

서양인들은 동양적 또는 불교적 ‘지혜의 말씀’을 인용할 때는 무턱대고 ‘중국인’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흔히 그것은 “다들 그러는데, 어쩌고저쩌고” 정도로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하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서도 “그건 공자님 말씀”이라고 할 때, 그것이 정말로 공자가 한 말이라기보다는 “세상이 다 아는 당연한 얘기”라는 뜻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번역에서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꼭 이해해야 하는 문화적 차이란 언어나 표현 방법의 차이뿐 아니라,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고방식과 심리의 얼개까지도 포함된다.

<안정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