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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세계/Useful Expression

어디서 거지같은 자식을 만나서-안정효 선생님의 Q-English

<34번가의 기적>에서는 산타클로스 노인을 prosecute(기소)한 검사 남편에게 아내가 “왜 선량한 노인을 persecute(박해)하느냐”면서 따진다. homophone은 아니지만, 아내는 비슷한 두 단어를 혼동한 눈치가 역력하다. 그리고 아내는 “(당신처럼 나쁜 남자가 아니라) 차라리 plumber(장돌뱅이)하고 결혼할 걸 그랬다”고 불평한다.

필자가 plumber를 대부분의 영한사전에서처럼 ‘배관공’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장돌뱅이’라고 한 데는 나름대로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하다. 지체 높은 검사의 부인이 왜 하필이면 plumber라는 직업에 견주어 남편을 비하하려고 하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우리말로 ‘배관공’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 직업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설명부터 하자면, plumber는 부엌에서 물이 빠지지 않거나 하수도가 막히는 등 집 주변의 허섭쓰레기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생활해결사’라고 하겠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plumber가 어떤 특정한 분야의 직업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의 경우에 어떤 특정한 인물의 신분을 비하하는 token(상징성)을 지닌 명칭으로 통한다. 이 또한 영어공부를 위해 꼭 이해해야 할 수많은 문화적 기호들 가운데 하나이니,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자.

<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을 보면 “부잣집 망나니 딸”이라는 소리를 듣기가 싫어진 여상속인 클로데트 콜베르가 가출한 다음 만난 신문기자 클라크 게이블에게 신세한탄을 한다. “I’d change places with a plumber’s daughter any day.”(난 당장이라도 차라리 배관공의 딸과 신분을 바꿔 가졌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다 부러워할 ‘부잣집 딸’과 가장 상반되는,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한심한 신세를 상징하는 인물로 이곳에 제시된 개념이 ‘배관공의 딸’이다. 그러니까, 명예훼손이라며 배관공들이 항의하는 뜻으로 시위라도 벌여야 할 노릇이지만, ‘배관공’은 사회적으로 가장 밑바닥 계층의 상징이 된다.

그래서 이왕 직업 자체를 지칭하지 않는 비유적 용법에서라면, 어려운 한자로 된 ‘배관공’보다는 귀에 익은 ‘장돌뱅이’가 훨씬 실감이 느껴진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뱅이’가 사람을 낮춰 부르는 접미사이고 보니 더욱 그렇다.

1962년 판 <케이프의 공포(Cape Fear)>를 보면 로버트 미첨이, 복수를 하고 싶은 이유를 변호사 그레고리 펙에게 설명하면서, 그가 형무소에 수감된 다음 “아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이 박살났다”는 얘기를 이런 식으로 한다. “She met a plumber and they wound up with a litter of kids.”(아내는 배관공하고 결혼해서 애들까지 낳았더군요.)

괄호 안의 번역은 텔레비전에 나온 자막이었는데, 악당 미첨이 한 말은 그렇게 얌전한 내용이 아니다. 우선 plumber는 단순한 ‘배관공’이 아니라 “이 세상에 아무리 사내새끼가 없기로서니 하필이면 장돌뱅이 같은 자식하고 결혼했느냐”는 혐오감이 가득 삼투한 단어이고, litter 또한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한배에 낳는 새끼들’을 지칭하는 집합명사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이 원작인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를 보면 아이를 다섯이나 낳고도 모자라서인지 “another in the oven(뱃속에 하나 더 담은)” 며느리를 보고 시아버지가 역겨워서 아들 폴 뉴먼에게 이런 소리를 한다. (another in the oven은 “또 애를 뱄다”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별로 점잖지 못한 표현이다.)

“She’s a good breeder. She will probably drop a litter.”(걔는 아이를 잘 낳는 기계야. 이번에는 아마 한꺼번에 대여섯 마리 깔 모양이구먼.) 이렇게 litter는 단순히 “아이를 낳는다”가 아니라 토끼처럼 “새끼를 잔뜩 깐다”는 의미를 담으며, 동사로 쓰면 “지저분하게 어지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런가 하면 breeder는 가축이나 짐승에 잘 어울리는 단어여서, 역시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지의 역겨운 인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짐승은 breed(새끼를 친다) 하고, 사람의 경우에는 give birth to나 have a child 또는 deliver a child라는 고상한 표현을 쓴다.

미첨이 한 말 가운데 wound up도 혐오의 감정이 잔뜩 묻어나는 표현이다. wind up은 “~한 식으로 끝장을 본다”는 의미로, 여기에서는 “무턱대고 어쩌다 보니 그런 꼴이 되었다”는 뒷맛을 남긴다. 따라서 마첨이 한 말을 좀 실감나게 번역한다면 이런 식이 되겠다. “그년은 어디서 거지 같은 자식을 만나서는 새끼만 수두룩 깠더군요.”

<유혹(Young at Heart)>에서는 모범적인 음악가 집안의 맏딸이 진짜 배관공과 눈이 맞는데, 이것은 계급 타파를 상징하는 상황으로 설정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가난뱅이 음악가 프랭크 시내트라와 부잣집 딸 도리스 데이가 힘겨운 사랑을 한다.

<34번가의 기적>에서 산타클로스 노인을 기소한 검사는 이렇게 긴 사연을 거쳐 “거지 같은 자식”만도 못한 신세가 되었고, 그래서 검사가 참다못해 아내에게 화를 낸다. “I am not persecuting him. I am prosecuting him. If I lose this case, you may get your wish.”(난 그 영감을 박해하는 게 아냐. 기소하는 거지. 이번 사건에서 내가 패하고 나면, 당신은 장돌뱅이와 결혼하고 싶다는 소망을 실천으로 옮겨도 좋아.)

이 예문에서 may에는 검사가 아내에게 ‘허락’해 준다는 의미가 담겼다. 그리고 모양이 비슷한 persecute와 prosecute 두 단어를 혼동하는 여자라면 아닌 게 아니라 ‘장돌뱅이 마누라’ 수준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