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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세계/Useful Expression

당신 참 끔찍하게 착한 여자야-안정효 선생님의 Q-English

모두(冒頭)에서 밝혔듯이 이 연재물을 준비하느라 필자는 5년에 걸쳐 2500편가량의 영화를 소탕했는데, 그 과정에서 영어 공부에 어떤 종류의 영화가 좋은지를 자연스럽게 확인했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계열은 브루스 윌리스, 스티븐 시걸, 아널드 슈워제네거 같은 근육질 배우들이 주연하는 멍청 영화로, 싸움박질·주먹질·칼질만 바쁘고 별로 대화를 주고받을 줄 모르기 때문에 두세 시간 귀를 곤두세우고 이를 잡듯 뒤져도 쓸 만한 문장은 두 개를 건지기가 어렵다. 활극 중에서는 그나마 서부극에 받아치기(retort) 기법의 좋은 대사가 많고, 웅변적 수사학이 발달한 사극은 그보다 한 단계 높다.

재치가 번득이는 문장은 희극에서 많이 나오고, 일반적으로 희극적 성향이 강한 음악극(musical)은 그보다 한 수 위로 올라간다. 노랫말이 갖가지 문학적 기법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스탠리 도넨과 진 켈리가 함께 연출한 고전 음악극 <춤추는 대뉴욕(On the Town)>을 보면, 노랫말이 아닌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homophone(동음어) 같은 기법이 마구 춤춘다.

곰 가죽만 몸에 두른 박물관의 원시인 납인형(蠟人形)과 똑같이 생긴 수병 줄스 먼신을 보고 첫눈에 반한 인류학자 앤 밀러가 소리친다. “I really love bear skin.”(난 진짜로 곰 가죽을 좋아해요.) 곰 가죽을 좋아하다니 참으로 취미도 distinct(특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밀러가 좋아하는 bear skin은 bare skin(맨살)의 동음어다. 그러니까 엉큼하게도 “홀랑 발가벗은 몸이 좋다”는 뜻이다.

마릴린 먼로에게 “What do you wear when you go to bed?”(잘 때는 무얼 입나요?)라고 기자가 물었더니 “Chanel 5”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샤넬 5 향수만 바르고 발가벗은 채로 잔다”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wear가 “(옷 따위를) 입다”와 “(화장품 따위를) 바르다”라는 의미로 함께 쓰인다는 점을 활용한 기막힌 pun이다.

<진홍의 도적(The Crimson Pirate)>에도 wear의 곁말놀이가 나온다. 영국 귀족으로 가장하고 총독의 만찬에 참석한 벙어리 해적 닉 크라밧에게 귀부인이 묻는다. “What does the Queen wear when she goes out these days?”(왕비께서는 요즈음 외출할 때면 무슨 옷을 입나요?)

닉 크라밧이 수화로 대답하자 그 내용을 버트 랭카스터 해적선장이 ‘번역’한다. “The Count says, the Queen wears the King out.”(백작께서 말씀하시기를, 왕비는 왕을 입고 나가신다는군요.)

물론 위 번역은 일부러 wear(입다)와 out(나가다)을 억지로 직역한 꼴이다. 하지만 두 단어를 붙이면, <남태평양>의 booby trap처럼,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wear(닳다)와 out(밖에)이 결합하면 “(잔소리 따위로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라고 뜻이 바뀌어서, 해적선장이 한 말은 “백작께서 말씀하시기를, 왕비가 진을 빼는 통에 왕이 넌더리를 친다는군요”라는 소리가 된다.

<춤추는 대뉴욕>에서는 줄스 먼신 수병이 박물관에 조립해 놓은 공룡의 뼈대를 실수로 무너트리고 도망치는 상황도 벌어진다. 그를 잡으러 다니는 경찰관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까지 쫓아가서 먼신과 함께 휴가를 나온 진 켈리와 프랭크 시내트라에게 묻는다. “Have you seen another sailor hanging/around/here?”(당신들 말고 다른 수병 한 사람 이 근처에서 못 봤어요?)

이 번역문은 hanging around를 붙여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라는 뜻으로 이해한 경우다. 하지만 around를 앞에 나온 hanging이 아니라 뒤따라 나오는 here에 붙여서 번역하면, “이 근처 어디엔가 매달린 수병을 혹시 못 봤느냐?”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는 경찰관들이 보지 못하게 먼신이 담벼락 너머로 켈리와 시내트라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 영화에서는 열정적인 택시운전사 베티 개럿이 프랭크 시내트라에게 반해서 과격하게 애정을 표시하며 열심히 쫓아다닌다. 주눅이 든 시내트라 수병이 그녀에게 노래로 심경을 털어놓는다. “You are awful.”(당신은 끔찍해.)

개럿의 표정이 사나워진다. 시내트라는 토라진 그녀를 달래주려고 한 마디 덧붙인다. “―awful nice to be my girl.”(내 애인이 되어주다니, 당신 참 끔찍하게 착한 여자야.) 뒤따라 나오는 설명 때문에 awful은 형용사에서 부사로 품사가 바뀌면서 의미 또한 ‘끔찍한’에서 ‘굉장히’라고 슬그머니 뒤집힌다.

잠시 후에 시내트라의 노래가 이어진다. “You’re boring.”(당신은 따분해) 그리고 다시 내용이 뒤집힌다. “― boring into my heart to stay.”(당신은 내 마음 속으로 뚫고 들어와서 떠나지를 않네.) ‘뚫다’와 ‘따분하다’라는 의미를 함께 지닌 겹말 bore를 가지고 뚫는 pu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