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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세계/세상에 대한 지식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 -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 석상 

 

루비콘강이란 이탈리아 북동부를 동류(東流)하여 아드리아해(海)에 흘러들어가는 작은 강을 말합니다. 이강이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BC 220년경로마시대의 역사 일화입니다. 

당시 로마의 카이사르는 크랏수스, 폼페이우스와 더불어 소위 삼두 정치를 편 인물입니다 

삼두 정치란 세 사람이 공동의 지위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말 하는데 철저히 원로원을 배척했기 때문에 일종의 독재 정치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단 한사람이 아닌 세사람이라는 것이 다를 뿐! 

 

카이사르는 집정관의 임기가 끝나자 갈리아 원정에 나서는데 (원정이 성공하게 되면 시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카이사르가 정복 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삼두 정치의 균형은 서서히 깨지게 됩니다 

 

원인은 바로 품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간의 연합을 이어주던 크랏수스의 죽음(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과 원정나간 카이사르의 공간을 차지해준 카이사르의 딸마저 죽어버리자 현실적으로 모든 권한이 폼페이우스의 손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두 세력이 손을 잡았을 당시 카이사르는 갈리아지방 총독으로 임기가 끝나자 곧 원로원에 갈리아 총독과 집정관 임기를 연장하겠다는 통첩을 보내지만 이는 곧 묵살 당하고 맙니다. 

 

결국 이후 로마에선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 간의 대립이 생기게 되고 폭동이 난무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집정관은 물론 이고 법무관조차 선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결국 원로원은 폼페이우스 한명만을 입후보시켜 집정관에 당선시키는 전례 없는 수단을 써서 사태를 수습하게 되고 이에 카이사르파는 카이사르를 집정관에 당선 시키거나 갈리아 총독으로써의 임기를 연장시켜 줄 것을 요구 하게 되는데 오히려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갈리아 총독에서 해임시키는 안건을 내놓아 카이사르를 압도적 차로 통과 시켜 버립니다 

 

카이사르가 강하게 반발 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결국 카이사르 호민관과 원로원 의원들은 노예로 변장하여 갈리아로가 카이사르에게 로마의 일을 고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안 카이사르는 결국 폼페이우스와 정면 대결하기로 결심하게 되고 네개의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되는 것입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은 카이사르가 강을 건너기 전에 한 말인데 그의 고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는 말입니다 

 

루비콘강은 속주와 이탈리아의 경계로서 당시 로마의 법에 개선하는 장군은 북으로는 루비콘강, 남, 서, 동으로는 바다 위에서 자신이 거느린 군대를 두고 개선하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이를 어기는 것은 바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총독의 자리를 내놓은 자는 군대를 거느리고 이 강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로부터 갈리아총독의 자리를 해임당한 처지로서 무장한 군대를 거트리고 이강을 건널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루비콘 강가에 도착해서 카이사르는 많은 고민을 했겠지요. 수행한 백인장군들의 의견을 들었으나 역시 본인의 생각과 같이 이미 사태는 벌어졌으니 결국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말하며 강을 건넌 것입니다. 루비콘 강을 군대를 이끌고 건넌 카이사르는 쿠테타를 일으켜 성공하게 됩니다. 

 

당시 카이사르의 서방에 지지 기반을 두었던 품페이우스가 크랏수스의 동방의 힘까지 등에 업고 카이사르와 일전을 벌이지만 패하여 이집트까지 도망치나 이집트의 한 신하가 그를 살해 카이사르에게 바치게 됩니다. 이때 이집트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 관계하게 되는 역사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공화정이었던 로마의 정치는 황제 단독의 제정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루비콘강을 건넜다’-‘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자신의 뜻이든 아니든 이미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 공화정이란? 

   원로원의원, 집정관, 호민관이라는 별개의 대표들의 모여 합의를 통해 이루어 가는 정치형태로서 이는 로마국가를 구성하는 인구 중에는 약 10-15% 수준의 파트리키(귀족) 약 50-60% 수준의 자영농민이 중심이 된 플레브스(평민)   약 30% 수준의 그 외 계층(노예 등)으로 구성된 이른바 중산층이 매우 두꺼운 건전한 사회였습니다. 

 

또한 사실상 로마제국의 국방은 약 60%에 달하는 자영농민들이 담당을 하였고 거의 모든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었죠. 때문에 그들의 역할과 정치계에서 지위도 막강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진적으로 변화되면서 차츰 귀족층을 중심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